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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정리

혼란하게 진행하기

by 향로 (기억보단 기록을) 2024.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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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픽사의 CEO 에드 캣멀이 쓴 "창의성을 지휘하라" 를 보고 있다.
여기를 보면 스타트업에 너무 적합한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은 효과가 검증된 것, 예컨대 과거에 통한 스토리, 방법, 전략에 안주하고 싶어한다.
새로 고안한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판명되면, 이 방법을 계속 사용한다.
조직은 이런식으로 학습한다.
조직은 성공을 거둬 성장할수록 기존 접근법에 집착하고, 점점 더 변화를 거부하게 된다."

"안정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안전해진다는 보장은 없다.
무작위성을 두려워하는 대신 인생에서 무작위성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무작위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선택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창의성의 산실이다."

"픽사의 열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업(UP) 은 픽사의 작품 중 가장 감수성이 풍부하고 독창적인 작품이다."
"원안의 스토리는 흥미로웠지만 결국 영화화할 수 없었다.
원안을 검토한 직원들은 두 왕자에게 공감할 수 없고, 하늘을 떠다니는 성이 있는 세계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평가를 들은 피트 닥터는 스토리를 곰곰이 되짚어보고 자신이 진정 전달하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최종적으로 원안에서 두 가지 요소만 살아남았다.
키 큰 새 라는 캐릭터와 '업(UP)' 이라는 제목이다."

"피트 닥터는 직원들에게 신뢰받고 사랑받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가 이 작품에서 보인 행보는 예측 불가능하고 따라가기 어려웠다.
이 작품은 당초 구상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됐다.
폐기된 스토리를 다시 발굴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무런 스토리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다."

"진정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혼란과 난관을 거쳐 나오는 까닭에 변화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지내야 하는 친구다."

 

첫번째 우아콘과 인프콘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주먹구구식이 많았다.
첫번째 우아콘은 갑자기 일정이 정해져서 사내 연사자 선정부터 강연 준비까지 급하게 준비되었다.
얼마나 급했냐면, 연사자들이 한달만에 발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촬영 당일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컨퍼런스를 녹화로 진행하는데, 정해진 날짜 외에는 스튜디오 예약이 안되서 당일에 무조건 촬영을 끝내야 했다.
그래서 모든 발표자는 당일에 원테이크로 발표를 했다.

한달만에 발표 준비를 해서 하루에 원테이크로 발표를 해야하는 대혼란의 과정이였던 것이다.
배민이라는 회사는 그래도 이제 국내에서 인정하는 큰 IT회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최초의 컨퍼런스를 이렇게 진행한다고??"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런 우려와 별개로 컨퍼런스의 반응은 정말 좋았다.
수십개의 블로그에서 발표 영상의 내용을 정리하고 Github에 예제 코드를 올릴정도로 말이다.

인프콘 첫 회는 더 급하게 진행되었다.
코엑스가 8월 15일 일정 밖에 안되었고, 그 일정에 맞춰서 인프콘을 개최하기로 했다.
4월 4일에 TF 채널이 개설되어 4개월만에 인프런 첫 오프라인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1,300명이 참여하는 사내 최초 오프라인 컨퍼런스를 4개월만에 완료한 것이다.

4개월만에 하려고 운영팀이 말도 안되는 시간을 쏟고,
개발팀은 컨퍼런스 페이지 만들 일정이 없어서 티저 페이지, 메인페이지는 디자이너분이 워드프레스로 구축해주셨다.
디자이너분이 하다하다 안되면 FE분들이 나서서 워드프레스 마크업을 수정해주셨다.
그렇게 대혼란의 컨퍼런스 준비 과정을 거치고 오픈했음에도 참석해주시는 많은 분들이 수많은 좋은 후기를 남겨주셨다.

우아콘도, 인프콘도 모두 하기로 결정했다면 속전속결로 진행했다.
그 안에서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모두 대혼란이였고, 이렇게 해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의 결정과 과정들이 대부분이였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프로세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컨퍼런스를 보는 외부의 입장에서는 모두 너무 잘 준비되었다고 해주셨다.
그리고 1회차를 기반으로 2회차에 훨씬 더 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일정이 부족하다고 다음해로 미뤘다면, 다음해에도 개최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회사는 항상 바쁘고, 항상 일정이 부족하니 말이다.


손자병법에서 언급한 "故兵聞拙速, 未睹巧之 久也 (고병문졸속, 미도교지 구야)" 말을 좋아한다.
"전쟁의 세계에서 졸속, 즉 다소 서투르더라도 속전속결로 승부를 내라는 말은 들었지만 치밀한 지구전을 언급한 것은 보지 못했다."

즉, 모자람이 있더라도 신속히 해야지, 만전을 기한다고 느리게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전쟁터는 상대가 한 수 두면, 고민 후에 나도 한 수 두는 장기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민은 적의 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하며, 전투가 시작되면 거침없이 몰아붙여야 한다.

보통 졸속이라고 하면 그 과정이 빈약하고 서투르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손자병법에서 언급한 졸속은 '서투르더라도(완벽하지 않더라도) 성공을 위해 재빨리 처리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맥락에서 강조되고 권장되었다.

배민에서부터 인프랩까지 거의 8년 가까이를 IT 스타트업에 있다보면 이게 IT 스타트업에 한해서는 올바른 결정이 된 적이 많았다.

물론 사람의 생명을 다루거나 큰 사건이 될 수 있는 일에는 당연히 졸속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변화가 극심한 IT 업계, 특히 스타트업에 한해서는 만전을 기하면서 기다리는 것 보다는 하기로 결정한 일이라면 빠르게 실행하고 목표 지점까지 가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냈다.

빠르게 진행하면 당연하게도 혼란함이 가득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좋은 결과는 이렇게 혼란함 속에서 발생하는것 같다.
준비가 다 되어있을때 시작할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준비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너무 혼란스럽다면 오히려 좋은 결과가 생길 기회라고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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