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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정리

어느 축구 선수의 은퇴와 선물

by 향로 (기억보단 기록을)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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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많은 분들을 뵙고 이야기 나누다가 빠르게 승진 중이신 분의 커리어 고민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굉장히 큰 회사에서 나이나 연차에 비해 빠르게 승진과 리더십 기회를 얻은 분이셨다.
최상위 리더의 평가만 좋은게 아니라, 같이 일하시는 주변 분들의 평가도 대단히 좋은 분이라서 "어떻게 하면 그 위치의 역할을 잘 할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 하시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였다.

오히려 너무 빠른 승진과 기회로 인해 비슷한 연차, 비슷한 나이대의 동료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였다.

권한 혹은 리더십이 높아질수록 점점 조직의 사정을 더 알게 되기도 하고, 개인의 성과 보다는 팀의 성과, 팀원들의 성과, 조직에 더 도움이 되는 결정 등에 대해 고민하다보니 매일 하는 업무, 고민, 생각 등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대화와 고민의 결이 달라지다보니 가까운 동료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주변인들과 너무 동떨어지는 것 같아 고립되는 것 같아요. 커리어를 천천히 가는게 더 좋지 않을까요?" 라고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기회를 얻고 싶어도 못 얻는 분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주변과 점점 고립되어가는 외로움과 연차에 비해 높은 기대감을 받는 것에 대한 부담감 등 여러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당사자에게는 정말 큰 고민이다.

대화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최근 화제가 된 어느 축구 선수(임민혁 선수)의 은퇴 글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임민혁입니다.
K리그가 개막하는 오늘, 저는 프로, 아마 총 18년 동안 이어온 축구 선수의 삶을 폐막하려 합니다.
서른 즈음 되면 대충 압니다.
세상에는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요.
포기하지 않고 끝내 쟁취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훌륭함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기에 한치의 미련 없이 떠나봅니다.
저의 축구 인생은 완벽하지도, 위대하지도, 아주 훌륭하지도 않았지만 정정당당하게 성실히 땀 흘려 노력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멋진 세계에서 멋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내 삶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오히려 언젠가부터 느꼈던 저보다 열정 있고 성실한 후배들의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자기 비하의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 속이 후련하고, 적어도 추한 선배는 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 하나는 지키고 그만두는 거 같아 다행이기도 합니다.
저는 더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새 인생을 살아갈 것 입니다.
3.1일.
새로 시작하기 날짜도 딱 좋네요.
여기저기 축하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모두들 감사했고, 잘 머물다 갑니다.

찾아보니 임민혁 선수는 국내 프로축구 2부리그인 K리그2 천안시티FC에서 골키퍼로 활동하다가 30살에 축구선수 은퇴를 선언하셨다.

보통 1부 리그에서 유명한 선수들의 이야기만 듣다보니 축구선수들의 연봉이나 대우가 엄청 좋다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선수들이 활동하는 2부/3부/4부 리그, 그 중에서도 상위 20%에 속하지 못한 선수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더 하위 리그인 K5, K6, K7 까지 있다.)

1부 리그에 속하지 못한, 그 안에서도 상위 20%에 속하지 못한 선수들을 생계형 계약직 선수라고 한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잘 나가는 상위 20%를 제외하고는 생계형 계약직 선수들이다.
시즌이 종료되었을 때 다음 시즌이 먼저 걱정되는 생계형 계약직 선수 말이다.
생계형 계약직 선수들에게는 여전히 추운 겨울이다.
작년 목포시청에서 함께 뛰었던 선수들 중 6명이 천안시청 공개 테스트에 참가했다.
이들은 후보선수가 아닌 주전 선수로 활약했던 선수들이다.
감독 교체로 기존 선수 중 6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계약 연장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팀을 찾기 위해 각 팀의 공개 테스트를 찾아가고 있다.
...
과거에 나도 팀을 찾기 위해 공개 테스트를 갔던 경험이 있다.
서울 E랜드, 부천 FC, 고양 Hi, 경주 한수원, 용인 시청 FC 이렇게 총 5개의 팀을 갔었다.
모두 탈락의 수모를 겪었고 2015년 1월 1일에는 무적선수가 되었다.
다음 날 다행히도 구사일생이 되어 기존 팀(대전 시티즌)에서 다시 기회를 줬기에 축구선수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
테스트로 뽑히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경험하게 되었다.
단 한 경기에 선수의 가치를 파악해서 뽑는다는 게 로또를 뽑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
막상 테스트를 통해서 팀에 입단한다면 최저 연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프로 팀 기준으로 최저 연봉은 2000천만원이다.
훈련 외에도 꾸준히 몸 관리를 하면서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는 직업인데, 최저 시급도 받지 못하는 급여를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잘하는 사람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런 열악한 현실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축구선수라는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
나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부, 2부, 3부(내셔널리그)를 뛰면서 매년 다음 팀에 대한 걱정을 했다.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갖춘 선수는 많았고, 나이는 점점 먹어갔다.
...
나는 축구를 사랑한다.
그래서 생계형 계약직 선수임에도 행복하다.
젊을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선수들도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돈만 보고서는 축구화를 신을 수 없다.
축구에 대한 열정, 꿈,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두 선수분들의 축구에 대한 사랑, 축구 선수로서의 행복에 대한 글을 보면 내가 하고 있는 개발자로서의 지금의 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임민혁 선수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에는 간절히 원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게 실현되는 일이 아니다.

물론 끝내 이루어낼때까지 해내는 분도 멋진 분이고,
본인이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으로 새로이 도전하는 분 역시 멋진 분이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실제로 좋은 역량과 평가까지 낼 수 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수없이 괴로운 일들도 많이 있겠지만, 그 기적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면 그건 신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리액션은
이 선물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업(業)에 있어서 선물을 받은 사람의 가장 감사한 표현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큰 선물에 부담감으로 답례하지말자.
선물의 크기에 맞게 성취로 보답하자고 그 분에게 이야기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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