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가 안되던 주니어 개발자일때를 돌이켜보면 "과연 내가 이 팀에서 필요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들때가 많았다.
당시에 내가 속해있던 팀은 연차에 관계 없이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보다도 어린, 나보다도 연차가 낮은 개발자분들이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코드로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을 볼때마다 계속해서 나와 비교를 했다.
좋은 팀을 이야기할때 "개인이 풀스택일 필요는 없지만, 팀은 풀스택이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한 사람이 모든 영역을 잘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가 고유의 전문 영역을 가지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준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팀에서 내가 무엇을 채워줄 수 있을지, 무엇이 내 고유의 전문영역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의 우리팀은 퍼블리싱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클라우드가 아닌 온프레미스 인프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localhost:8080 밖에 모르던 나에게 수십대의 인프라를 관리하는 것과 이를 위한 여러 스크립트들은 외계어처럼 보였고,
jQuery밖에 모르던 나에게는 Backbone.js 기반의 프론트엔트 MVC 아키텍처가 생소했고,
SDK import밖에 모르던 상태에서 commonjs와 Grunt & Gulp 환경도 생소했다.
그나마 경험있던 Java & Spring 경험은 Spring Boot와 Hibernate (영한님의 책이 출간되기 전) 를 만나고 초보자가 된 기분이였다.
나의 쓸모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고 그간 믿었지만, 이 그룹 내에서 쓸모가 없다는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고 장영희 교수의 저서인 내 생에 단 한번 의 "눈먼 소년이 어떻게 돕는가?" 챕터를 보게 됐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하나의 토론 주제를 주었다.
- 핵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동굴이 있고, 그 동굴에는 6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 아래 10명 중 동굴에 들어갈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가?
- 수녀
- 의사
- 눈먼 소년
- 교사
- 갱생한 창녀
- 여가수
- 정치가
- 여류 핵물리학자
- 농부 (청각 장애자)
- 나 자신 (아무런 기술도, 능력도 없는 백수상태)
이 중에서 눈먼 소년을 6명 안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중요했다.
"눈이 멀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에 아주 바쁠것인데 누가 소년을 돌본단 말인가.
물론 소년을 동정해야하지만 감상적이되면 안 된다.
이건 실제 상황이니 좀 더 현실적이어야 한다.
동정과 인간애는 실리적이지 못하다."
이 의견에 대해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이 의견을 내었다.
"나는 소년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가장 커다란 공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나라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일을 하느라 아주 바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분명히 경쟁,질투,미움에 사로잡혀 권력을 놓고 싸울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 이 눈먼 소년처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 자기 시간을 쪼개 그를 도와야할 것이다.
그러면서 남을 돕고, 남을 위해 나의 작은 것을 희생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남을 돕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나라라면, 그런데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있던 고민인 "나의 쓸모" 에 대해서 큰 연관이 있던 글은 아니였다.
하지만, 이 글을 읽고나서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 될 수 있겠다" 는 생각을 했다.
청각 장애인 농부도 만약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겨울에는 본인이 쓸모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눈 먼 소년을 돕다보면 본인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겨울을 지낼 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취준생, 1~2년차 신입 개발자들의 멘토링을 시작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던 회사 안에서가 아닌,
회사 밖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는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작은 지식들, 경험들도 누군가에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가지고 있는 비교, 쓸모없음에 대한 걱정 등을 이 멘토링을 통해 덜어낼 수 있었다.
물론 외부에서만 인정을 받고, 내부에서는 인정을 못받으면 다시 자존감이 무너질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회사를 위한 공부도 계속해서 진행했고, 어느새 회사에서 특진을 비롯한 여러가지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쓸모를 타인이 결정하게 만들어선 안되겠지만,
타인의 인정을 무조건 무시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일반인이 할 수 있지는 않더라.
내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주변에서도 나를 인정하는 시기가 온다.
하지만 그 시기까지 버티는 것이 어렵다.
그럴때 남을 도와줘보자.
내가 가진 이 작은 경험과 지식도 누군가에겐 그토록 바라던 도움일수도 있다.
남을 돕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일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