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인이 속한 스타트업의 개발팀 리더가 되신 몇몇 분들의 고민을 듣다 보면 공통된 의견으로 "대표님이 AI에게 물어보고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는 것이었다.
제품, 기술 외에도 사업 전략, 인사 판단, 신규 사업 방향까지.
예전이라면 옆에 있는 C레벨이나 상위 리더에게 먼저 꺼냈을 이야기를, 이제는 ChatGPT에게 먼저 던진다.
편리해서 그런 걸까?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들의 머릿속에는 매일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어떤 것은 꽤 괜찮고, 어떤 것은 본인도 "이건 좀 아닌데..." 싶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생각들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듣는 사람이 아이디어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꺼낸 사람까지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대표님이 이런 판단력이면 괜찮은 건가?"
"이걸 진지하게 말하는 건가?"
대표님들도 이걸 안다.
그래서 조심하게 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함부로 꺼내지 못한다.
게다가 대표님의 말은 조직 안에서 질문이 아니라 신호로 들린다.
"이거 해보면 어떨까?" 라는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곧 다음 주 업무가 된다.
그래서 사람 앞에서는 탐색의 언어가 쉽게 지시의 언어로 번역되고, 대표님은 부담이 덜한 AI에게 먼저 생각을 던지게 된다.
AI에게는 이런 걱정이 없다.
AI는 아이디어를 평가하지 않는다.
대표님의 자질을 평가하지 않는다.
"대표님이 이런 말을 했다더라" 하고 퍼뜨리지도 않는다.
체면 비용이 0이다.
그래서 대표님들은 AI 앞에서 편하다.
정리 안 된 생각을 그대로 꺼내도 된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된다.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던져봐도 된다.
"그게 AI를 먼저 찾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건 대표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책임이 커질수록, 누구나 정리 안 된 생각을 사람보다 AI에게 먼저 던지고 싶어진다.
물론, "AI에게 물어보는 것이 문제인가?" 라고 할 수 있다.
AI에게 먼저 물어보는 것 자체는 괜찮다.
하지만 AI에게'만' 물어보게 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대표님이 어떤 생각을 했고, 왜 그 방향을 고민하게 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결론에 도달했는지.
이 흐름을 주변 리더들이 전혀 모른 채로 결과만 전달받는 상황이 생긴다.
생각의 시작과 과정이 공유되지 않으면, 조직은 대표님의 결론만 실행하는 구조가 된다.
하지만 AI에게만 묻게 되면 놓치는 것이 생긴다.
AI는 우리 조직의 맥락을 모른다.
작년에 비슷한 시도를 했다가 왜 실패했는지, 누가 그 프로젝트로 이미 지쳐 있는지, 지금 이 팀에 이 일을 더 얹으면 어떤 균열이 생길지.
이런 건 조직 안에 있는 사람만 안다.
게다가 AI는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데는 강하지만, 질문 자체를 다시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대표님이 정말 필요한 건 답이 아니라, "지금 더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 질문부터 다시 봐야 합니다"라고 말해줄 사람일 때가 많다.
질문을 새 프레임으로 바꾸고, 조직의 현실과 우선순위를 다시 환기시키는 일.
그건 사람만 할 수 있다.
대표님이 당신에게 정리 안 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보자.
"이거 해보면 어떨까?" 라는 말이, 당신 기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이때 반응이 갈림길이다.
즉시 "그건 안 됩니다" 라고 반박하거나.
표정으로 "또 시작이네" 라는 신호를 보내거나.
회의 끝나고 다른 임원에게 "대표님이 오늘 이런 말 했는데..." 라고 흘리거나.
돌이켜보면 나도 이렇게 반응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한두 번 쌓이면, 대표님은 입을 닫는다.
그리고 AI를 연다.
반대로, 일단 끝까지 듣고.
"왜 그 생각을 하게 됐는지" 를 먼저 물어보고.
그 맥락 위에서 "이런 부분은 이런 이유로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의견을 더하면.
대표님은 다음에도 당신에게 먼저 이야기한다.
AI가 아니라.
대표님의 정리 안 된 생각을 받아주고, 그 자리에서 감정을 삼키고 끝까지 듣는 건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리더들도 지쳐 있고, 그들에게도 고민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행인 건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전문성은 많은 사람이 갖추지만, 판단 없이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프로그래머, 열정을 말하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34장 모험 여행 안내자]
고객은 자기가 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편하게 말해줄 사람을 찾으려 한다
....
개발자는 IT세계라는 까다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고객의 안내자다.
개발자는 고객이 낯선 곳을 여행하는 동안 편안하게 안내해야 한다.
한 분야의 전문가이자 그 분야의 최고 책임자로 있다면, 혹은 그 자리로 성장하고 싶다면, 그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여행 가이드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느 고객도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화를 내거나 경멸하는 여행 가이드를 다시 부르지 않는다.
주변에 추천하지도 않는다.
대신 다음번에는 혼자 검색하거나, AI를 연다.
세상의 많은 대표님들은 이런 우려를 안고 있고, 생각보다 외롭다.
"하 우리 대표님은 왜 이래" 라고 생각하면서, 대표님이 이상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다른 조직으로 간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어디를 가든 대표님은 있고, 그 대표님들도 비슷한 걱정과 불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걸 기회로 볼 수 있다.
대표님들에게는 친절한 여행 가이드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걸 해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경쟁력이다.
AI는 판단받는 부담 없이 들어준다.
우리도 그렇게 들을 수 있다.
거기에 우린 맥락, 책임을 더해 답할 수 있다.
먼저 재단하지 않고 듣고, 맥락을 더해 답하는 것.
그게 AI가 대체할 수 없는 리더의 역할이다.
대표님이 AI 대신 리더들을 찾게 만드는 건, 전문성이 아니라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