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CTO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다.
"AI가 도입되어서 미친듯이 속도전을 하면서 정말 개발자들의 그런 속도가 회사에 기여한다고 느껴지시나요?"
여러 답변이 나왔다.
"AI 도입이 개발자의 생산성을 키웠을진 몰라도, 개발팀이나 제품팀 전체의 생산성이 증가하진 않았다"
"AI 로 인해 개발 속도는 빨라졌지만 개발팀도 모르는 코드가 늘어서 장기적으로 더 큰 문제를 계속 쌓고 있는 것 같다"
"개발자의 코드 생산성은 높아져도 기획, 디자인이 병목이라 그건 개발팀이 해결해줄 수 없어서 여전히 생산성을 체감 하기 힘들다"
등등의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내 차례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개인 개발자의 생산성은 확실히 오른 것 같다.
그런데, 개발팀의 생산성이 올라간다고 해서 그게 곧바로 회사 성과로 이어지진 않는다고 다들 느끼시는 것 같다.
개발팀의 생산성의 기여가 사업에 비례한다면 지금의 대량해고가 발생할 리가 없다.
비례한다면, 기존에 5이던 생산량이 20, 100으로 늘었으니 더 뽑아서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게 맞지 않겠나?
근데 오히려 인원을 줄여서 기존의 생산량을 더 적은 인원으로 하는 것을 회사들이 원하는 분위기이다."
스타트업 생활을 10년정도 하면서 직접 경험도 하고, 다른 회사들의 분들과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사업에는 Min 값과 Max 값이 있으며, 개발자는 Min 값을 책임지고, 사업/세일즈/마케팅과 같은 팀이 Max 값을 책임진다".
개발팀은 제품이 돌아가게 만들고, 버그를 잡고, 성능을 올리고, 장애를 막는다.
사업의 바닥을 든든하게 깔아주는 역할이다.
Min 값이 무너지면 사업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까,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반면 사업/세일즈/마케팅은 Max 값을 책임진다.
새로운 시장을 열고, 고객을 데려오고, 매출의 상방을 끌어올린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Min 값을 아무리 효율적으로 달성해도, Max 값의 천장이 바뀌지 않으면 사업은 커지지 않는다.
국내 많은 IT 회사들의 구조를 보면, 기본적으로 사업 조직이 상방을 계속 열고, 제품이 그 상방을 쫓아가는 형태로 되어 있다.
사업이 새로운 시장을 열면, 개발이 그걸 제품으로 구현하고, 다시 사업이 다음 상방을 연다.
이 사이클이 돌아갈 때 회사가 성장한다.
개발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는 그간의 스타트업들을 떠올려보면 더 그렇다.
대부분 사업의 성장을 기술력과 제품력이 따라가지 못할 때 개발팀의 생산성과 채용을 중심으로 둔다.
"이번 마케팅이 너무 잘됐는데 장애 나서 역대 최대 매출을 찍지 못했다",
"계속 늘어나는 가입자 수를 버티지 못해서 전체 서비스가 매일 느리다는 CS가 들어와서 고객이 떠난다."
이런 문제들로 사업 성장에 발목이 잡힐 때 개발자를 뽑는다.
"회사의 매출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해서 개발자를 뽑은 적이 있나?"
SaaS나 제품이나 기술 자체가 판매 상품인 경우가 아니고선, 국내에서 그런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개발자 채용은 사업의 상방을 기술이 못 받쳐줄 때, 즉 Min 값이 무너질 위기에 발생하는 것이지, Max 값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상방이 더 이상 열리지 않는 상태에서 개발자의 생산성만 올라간다면?
평소 먹는 식단으로 필요한 비타민이 다 채워지지 않을 때는 비타민 영양제를 추가로 먹어야 한다.
하지만 비타민 영양제가 할인 중이라고 왕창 사서 몇 배씩 먹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할인하더라도, 그 이상의 비타민은 나에게 필요하지 않고, 더 먹어봐야 소변으로 배출될 뿐이니까.
오히려 그 돈으로 다른 부족한 영양을 채울 수 있는 보충제를 사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더 건강해지는 방법이다.
개발 생산성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업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개발력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생산성을 높이는 게 맞다.
하지만 AI로 개발 생산성이 크게 올라서 이미 충분한 상태라면, 거기서 더 올리는 건 비타민을 몇 배씩 먹는 것과 같다.
더 먹어봐야 소변으로 나갈 뿐이다.
스타트업에 대한 기대를 생각해보자.
연매출 1,000억인 회사가 있다.
영업이익을 50억에서 100억, 200억으로 늘려나가는 것과,
영업이익은 50억에서 더 늘지 않더라도 매출이 1,000억에서 2,000억, 5,000억으로 늘어나는 것.
어느 쪽이 스타트업에게 기대하는 모습인가?
당연히 후자다.
영업이익 개선은 비용 최적화의 영역이다.
FinOps를 하고, 인프라 비용을 줄이고, 개발 효율을 높여서 같은 매출 대비 더 많이 남기는 것.
물론 이것도 회사의 개선이다.
하지만 이건 Min 값을 더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지, Max 값의 천장을 높이는 게 아니다.
AI로 개발 생산성을 높여서 비용을 줄이는 건, 1,000억 매출에서 영업이익을 50억 더 짜내는 일에 가깝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스타트업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사업 구조는 개발팀의 생산량이 올라가는 만큼 매출을 낼 수 있는 구조인가?"
이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현재 개발팀의 생산량이 계속해서 올라가도 괜찮을 만큼, 사업 구조가 계속 성장할 여지가 있는가?
다른 사업팀의 병목은 없는가?
디자인이 너무 구려서일 수도 있고,
고객 응대가 너무 성의 없어서 이탈이 계속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마케팅으로 고객에게 도달 자체가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세일즈에서 전환되는 고객 수가 적은 것일 수도 있다.
아예 근본적으로 사업 구조가 더 이상 더 커지기 힘든 시장에서 플레이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개발팀의 생산성이 지금 영양과다 비타민이 아닌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계속해서 개발팀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힘을 쓸 것이 아니라, 일정 궤도 이상이라면 개발팀은 조직 전체의 병목 지점을 해쳐나가기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비타민이 이미 충분하다면, 그 돈으로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