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발실리가 영화 블랙베리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 인터뷰 기사도 함께 보면 더 재밌다.
박소령 대표님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다 보고, 이어서 넷플릭스에서 블랙베리를 봤다.
2시간이 너무 짧았다.
더 깊게 이야기를 보고 싶었는데, 2시간 동안 십수 년의 기록을 담아두려니 생략된 이야기가 많아서 아쉬웠다.
아쉬움과는 별개로 마음에 확 와닿는 대화 내용들이 몇 개 있었다.
더그 프레긴은 블랙베리 특유의 분위기를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하며,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마이크는 점점 기업의 CEO로 변해갔다.
베스트 프렌드이자 공동 창업자였던 더그 프레긴과 마이크 라자리디스의 대화다.
더그: "저거 봤어?"
마이크: "아니"
더그: "짐이 영화의 밤을 없앴어.
직접 할 배짱도 없어서 140kg 덩치를 불러서는 소리 지르고 다니게 했잖아.
앨런을 해고하겠다고 했대"
마이크: "... 일을 하긴 해야 해"
더그: "이 친구들이 일주일에 80시간을 기꺼이 일하는 이유를 알긴 해? 가족도 못 만나고, 인정도 못 받는데?"
마이크: "알지, 세계 최고의 휴대폰을 만들고 있으니까"
더그: "그래. 그런가 보다"
스타트업에서는 일을 일처럼 보지 않는 문화가 많다.
그런 문화가 성과를 최적화하는 데는 방해가 된다.
그래서 조직이 커지다 보면 그런 문화가 점점 옅어지게 된다.
반면에, 새로운 시도는 그런 문화 속에서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에 블랙베리가 일반적인 대기업으로 변해가지 않고, 위 문화를 유지했다면 아이폰의 등장을 어떻게 봤을까?
분해하고, 해체하고, 모방하고, 시도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블랙베리만의 스마트폰을 만들어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이폰의 발표 이후 투자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이크는 공수표를 남발한다.
마이크: "짐은 지금 워터루에 있어요.
다른 얘기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아직 완성 단계는 아니지만 극비에 개발 중인 기술이 있거든요.
시제품이 나오려면 몇 주가 더 필요하지만.
큰 틀은 우리 블랙베리에요.
다만 여기 있는 키보드가 화면이에요.
전체가 다 스크린이죠.
대신 우리 제품은 이걸 누르면 그대로 경험할 수 있어요.
달칵하는 블랙베리의 키감을 느낄 수 있죠.
스크린, 키보드, 전화.
감이 오시나요?"
이 발표로 마이크는 버라이즌에 100만대를 판매한다.
그리고 몇 주 내 시제품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팀에게 갑작스러운 요구 사항을 전달한다.
마이크: "아니, 아니야 잘 들어.
스크린이긴 한데 내가 여기 쓴 대로 경첩이든 액추에이터든 다는 거야.
화면이랑 몸체 사이에.
그러면 화면을 누를 때마다 달칵거리겠지."폴 스태노스: "이걸 왜 하는지 궁금해요"
마이크: "지금 여기에서 그런 질문은 하면 안되지.
'왜' 는 몰라도 돼! 알겠어?
내가 하라잖아.
내가 이걸 팔았다고, 알겠어?
근데 누구야?"
"'왜'는 몰라도 돼" 라는 말을 나는 몇 번을 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또 팀원들이 보기엔 표현 방식만 다를 뿐이지 같은 뜻으로 전달받기도 했겠지?
해야 할 일을 당장 시작하기 위해서 설명을 하다가 나 스스로 설명을 포기하고 "일단 해"라고 얘기한 적은 없을까 기억을 많이 뒤적이게 된다.
마이크는 점점 거대기업의 CEO가 되어간다.
블랙베리 초반, 팀이 풀지 못했던 엔지니어링 문제를 풀기 위해 데려왔던 구글 엔지니어링 팀장인 폴 스태노스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 장면이 특히나 기억에 남았던 것은 영화 초반에 마이크는 짐에게 핸드폰을 더 판매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 블랙베리의 완성도와 안정성을 위해 더 이상 판매하지 말고 물량을 조절해야 한다는 의견을 계속 피력한다.
그랬던 마이크가 이제는 공수표를 남발하면서까지 세일즈를 한다.
납득할 수 없는 납기일과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기능까지 요구하면서 결국은 고객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제품을 출시하게 된다.
마이크는 자신이 만든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기에 후발주자이자 블랙베리와 완전히 대척점에 선 제품인 아이폰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터치폰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결코 '아이폰 같은' 이란 표현은 쓰지 않는다.
병적으로.
더그: "정리하면 블랙베리만의 키감을 유지하면서 아이폰의 화면을 접목하면 돼.
그게 다야."
마이크: "아니야, 그게 아니지!
애플의 무언가를 접목하는 게 아니야.
여러분 어려운 일이 아니야.
돈을 많이 받았잖아.
어렵지 않아.
결국 키보드야.
화면 위에 키보드.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 없어"
조화로워보였던 짐과 마이크의 협업도 점점 서로간의 방임으로 가기 시작했다.
팀원: "아이폰에 대한 소비자 기대치가 사상 최고를 기록했어요.
세계 1위 휴대폰에서 아이폰 이전 휴대폰이 되게 생겼다고요."
짐: "괜찮아. 마이크가 해결할 거야"
마이크: "증권 거래 위원회가 왜 우릴 조사해요? 스톡옵션 일이라던데"
짐: "별일 아닐 거예요"
마이크: "별일 아니에요?"
짐: "그럼요. 애플 일은 어때요? 우리 위험해요?"
마이크: "아뇨."
짐: "어째서요?"
마이크: "기기당 데이터 사용량이 블랙베리 5,000대고 키보드도 없고 그냥 말이 안 되니까요."
짐: "다들 우리가 끝났다고 떠들어 대는데요?"
마이크: "다들 멍청이거든요."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모니터링하지 않았다.
제품이 뒤처지고 있어도 "마이크가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했고,
세일즈가 무리한 약속을 해도 "짐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넘겼다.
공동 CEO 체제의 장점은 전문성의 분담이지만, 단점은 책임의 분산이다.
블랙베리에서는 그 단점이 극대화되었다.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신뢰가 아니라 무관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단일 CEO였다면 어땠을까?
영업과 제품 둘 다 문제가 있을 경우 둘 다 CEO가 강력하게 개입했을 것이다.
각 분야별 C레벨이 있더라도 결국은 CEO가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구조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영화로 본 것 같았다.
레딧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봤다.
같은 회사를 이끌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실제로 짐 발실리는 NHL 하키팀 인수에 집착하느라 회사 일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피츠버그 펭귄스, 내슈빌 프레데터스, 피닉스 코요테스까지 세 번이나 팀 인수를 시도했고, 모두 실패했다.
2008~2010년 RIM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레딧에 이렇게 썼다.
"짐은 하키팀 사는 데 너무 몰두해서 시장에서 눈을 떼버렸다.
나는 실리콘밸리에 살았는데, 아이폰에 대한 열광이 진짜라는 걸 봤다.
하지만 RIM 임원들은 그걸 믿지 않았다."
한편 마이크 라자리디스는 물리 키보드에 대한 자부심에 갇혀 터치스크린으로의 전환을 거부했다.
아이폰이 2007년 6월에 나왔는데, 블랙베리가 터치스크린 폰을 내놓은 건 짐 발실리가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였다.
상호 보완적인 상위 레벨의 구조는 "역할 분담"만 있어서는 안 되고 "상호 이해"도 있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다.
나와 대표님도 역할이 나뉘어 있다.
대표님은 비즈니스와 전략을, 나는 기술과 제품을 담당한다.
하지만 그것이 상호보완이 되려면, 서로의 영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저건 대표님 영역이니까", "저건 CTO 영역이니까"라고 선을 긋는 순간, 우리도 블랙베리처럼 동상이몽에 빠질 수 있다.
역할만 나누고 이해가 없으면, 그건 그냥 분리일 뿐이다.
블랙베리의 두 CEO는 역할은 완벽히 나눴지만, 상호 이해는 없었다.
그래서 위기가 왔을 때 서로를 도울 수 없었다.
기술 리더로서 비즈니스를 이해하려는 노력,
비즈니스 리더로서 기술을 이해하려는 노력,
이 양방향의 노력이 있어야 진정한 파트너십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저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방치로 이어지고, 결국 조직 전체가 무너진다.
요즘 회계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기술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대표님이 보는 숫자를 나도 읽을 수 있어야, 같은 그림을 보고 대화할 수 있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결국 "마이크가 알아서 하겠지", "짐이 알아서 하겠지"가 되어버린다.
역할을 나누되, 관심은 나누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