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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똑똑한 사람이 되지 않기

향로 (기억보단 기록을) 2024. 6. 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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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아티스트가 2분 계시는데, 윤종신과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두 분 모두 아티스트지만 번뜩이는 영감 보단 꾸준한 매일의 힘을 강조해서 굉장히 좋아한다.

그러다 최근에 폴인에서 했던 윤종신님의 인터뷰를 봤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에요.
적당한 무딤?
30대 초중반엔 엄청 섬세했던 것 같아요.
근데 그때 무디고, 조금 덜 생각하고를 택했어요.
너무 예민하고 너무 많이 알려고 하는 거를 포기했죠.
그래서 이쯤에서 나 유리한 대로 그냥 생각하고 기본적으로 예상을 잘 안해요.
그게 제가 약간 늦게 깨닫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조금 다른 각도의 얘기인데,
제가 일찍 깨닫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요.
일찍 깨닫는 거는 그냥 그 사람이 아는 거거든요.
경험하지 않고 뭔가 깨닫는 사람이 있어요.
그거는 좋게 얘기하면 머리가 좋은 거고
저는 반대로 얘기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겪고 느껴야 돼요.
깨달음은 늦는 맛이죠.
깨달음은 늦어야 바뀌죠.
근데 일찍 뭔가를 깨달아서 알았어.
그럼 우리 그런 애들 영재, 천재, 신동 이렇게 얘기하는데 다 불행해요.
일찍 깨달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깨달을 게 없고 불행하게 살더라구요.
저는 깨달음은 무조건 시행착오도 좋고 늦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 송길영×윤종신 "흥했다, 망했다? 평가의 대상에서 벗어났죠"

이 말이 너무 와닿았던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설을 쓴다는 건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작업인 것 같습니다.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
...
어쩌면 소설이란 약간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한권쯤은 비교적 술술 써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총명한 사람들이라면 아마 소설 쓰는 작업에서 기대한 만큼의 메리트를 찾지 못했겠지요.
한두 편 써보고 '아, 이런 것이었구나' 라고 납득하고 곧장 다른 분야로 옮겨 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소설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몹시 '둔해빠진' 작업입니다.
거기에 스마트한 요소는 거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
어렸을 때 어떤 책에서 후지산을 구경하러 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때까지 후지산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산기슭에 서서 몇 가지 각도로 바라보고 '아, 후지산이란 이런 곳이구나. 그래, 역시 이러이러한 점이 멋있어' 라고 납득하고 돌아갔습니다.
매우 효율성이 뛰어나지요.
얘기가 빨라요.
그런데 머리가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쉽게는 후지산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혼자 남아서 실제로 자기 발로 정상까지 올라갑니다.
그러자니 시간도 걸리고 힘도 듭니다.
체력을 소모해 녹초가 됩니다.
그리고 그런 끝에야 겨우 '아, 그렇구나, 이게 후지산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한다고 할까, 일단 몸으로 납득합니다.
소설가라는 종족은 (적어도 대부분은)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머리가 그리 좋지 않은 사람 쪽에 속합니다.
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
아니, 그러기는 커녕 몇 번을 올라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혹은 올라가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다, 라는 게 소설가의 천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건 뭐, 효율성을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문제지요.
아무튼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못 할 일입니다.
...
내가 본 바로는 그런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 있는 햇수는 - 알기 쉽게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 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지요- 기껏해야 십 년 정도입니다.
그 기한을 넘어서면 두뇌의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 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합니다.
말을 바꾸면,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잘 갈린 손도끼' 로 전환하는 게 요구됩니다.
그리고 좀 더 지나면 '잘 갈린 손도끼'를 '잘 갈린 도끼'로 전환하는게 요구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충분한 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속단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많은 부분을 보지 않고, 일부 단면을 보고 주변의 인간 관계 (이성, 교유 등), 내가 선택한 직업군, 내가 속한 조직, 우리 서비스 등등 섣불리 판단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 곳은 가망이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일부 단면만 보고, 혹은 초기의 어설픈 모습만 보고 전체를, 앞으로의 미래를 판단할 수는 없다.
무수히 많은 요소들로 인해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10년전, 20년전 똑똑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개발자를 직업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노력, 투자, 시간에 비해 그 시기에는 보상이 타 직업군에 비해 너무 적었고, 앞으로의 미래도 땔깜, 상하차, 치킨집으로 항상 이야기 되었으니 말이다.

토스, 배민, 쿠팡 등의 회사들도 10년전의 모습을 봤다면 아무도 그 회사에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을 새고도 정시에 출근을 해야한다던가,
주말 근무가 당연한 회사,
계속된 서비스 실패로 피벗만 몇번씩 진행하고 종국엔 리더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회사
거대한 회사가 되기전까지의 모든 회사는 다 부족하고 부정적인 모습들이 많다.

그리고 그 회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낸데는 속단하지 않고, 무던하게 끝까지 일에 집중했던 사람들 덕분이다.

누군가를, 특정 직군을, 어떤 조직을 섣불리 판단 하지 않고, 무던하게 조금 지켜볼 필요가 있다.
너무 섬세한 사람은 본인이나 주변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항상 현명한 선택만 한다던가, 예리하다던가 하는 것이 사실은 결과까지 가는 과정에서의 조금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여 제대로 된 결과를 계속해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최근 재미난 글을 봤다.
AI에 점령당한 체스 업계에서 레이팅 500 차이를 극복한 박선우 선수의 이야기였다.
레이팅 500 차이면 승률이 4%라고 한다.
특히 요즘 같이 확률 계산이 거의 정확하게 떨어지는 세상 속에서 이는 거의 극복하기 어려운 확실한 차이이다.
몇 수를 둬보면 대번의 이 게임은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음에도 박선우 선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엔 승률 4% 게임에서 승리를 따냈다.
섣불리 판단했다면 이뤄내기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조금은 무던해지자.
지금 내 추측으로, 예상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고 지금의 내가 보고 있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미래는 거의 없다.

지금의 내 눈의 불편함들도 개선할 수 있다면 개선하되,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섣불리 실망하고 포기하는 그런 똑똑한 사람이 되지는 말자.

특히, 그 사람은, 그 직업은, 그 조직은 별로라는 이야기를 주변에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 직업, 그 조직이 잘 되었을때 본인만 바보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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