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판교 일대를 걷다 보면 여러 현수막을 보게 된다.
회사마다 개발자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다.
AI가 코드를 작성하는데, 개발자만 꼭 개발을 해야 하느냐, 개발자가 꼭 개발만 해야 하느냐는 이야기가 많다.
직접 문제를 풀던 시간은 줄고, AI에게 일을 시키고 결과만 넘기는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개발자분들도 많다.
AI로 바이브 코딩을 하면서 개발자가 아닌 사람들도 업무에 쓸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됐다.
앞으로 이렇게 만드는 사람은 더 많아질 거고, 그만큼 사고도 생길 거다.
혼자 쓰려고 만든 프로그램에서 회사 정보가 밖으로 샐 수도 있고, 데이터를 고치다가 원래대로 돌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다시 개발자만 프로그램을 만들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직접 만들어 쓰는 게 얼마나 편한지, 누군가가 해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편한지 이미 대부분 경험했으니까.
예전엔 어렵던 일을 도구 덕분에 누구나 할 수 있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손 위생이 자리 잡기 전에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일 자체가 위험했다.
1860년대 영국 글래스고의 한 병원에서는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의 절반 가까이가 감염으로 목숨을 잃었다.
손과 상처를 소독하기 시작하자 그 비율은 15%까지 떨어졌다.
지금은 손 씻기를 가르치는 것만으로 설사병에 걸리는 사람이 23-40% 줄어든다고 한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비누 하나로 감염을 꽤 막을 수 있다.
그렇다면 비누가 흔해진 뒤로 위생과 감염을 다루는 사람들의 일은 줄었을까.
영국에서 비누는 무거운 세금 때문에 한때 마음껏 쓰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비누세가 없어지자 비누 산업이 빠르게 커졌다.
그 뒤 아버지의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던 윌리엄 레버는 비누를 무게로 달아 파는 대신 한 장씩 잘라 포장해서 팔기 시작했다.
이 비누 장사가 2025년 한 해 매출만 약 78조 원인 도브와 바세린을 파는 유니레버가 되었다.
반면, 비누만으로는 막지 못한 감염도 있었다.
1959년 영국에서는 병원 감염만 맡는 감염관리 간호사가 처음 생겼다.
비누를 만들고 퍼뜨리는 사람, 비누로도 막지 못하는 감염을 연구하는 사람처럼 위생을 다루는 일은 오히려 여러 갈래로 늘었다.
설사를 막는 일의 상당 부분은 비누가 맡고, 의사는 손을 잘 씻고도 걸리는 설사를 들여다보는 셈이다.
AI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지면 개발자가 하는 일은 지금과 달라질 수 있다.
그 변화도 위생을 다루는 일처럼 갈래가 늘어나는 쪽일 것 같다.
회사의 비누를 만드는 사람, 그리고 비누가 있어도 생기는 사고를 해결하는 사람처럼.
누구나 AI로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회사의 비누가 있어야 한다.
회사 데이터에 안전하게 연결되고, 실수해도 되돌릴 수 있고, 매일 써도 비용이 부담되지 않는 AI 환경 말이다.
개발자가 이런 비누를 만들어 두면 개발자가 아닌 사람도 마음 놓고 AI로 일할 수 있다.
이런 비누로도 막지 못하는 사고가 있다.
AI로 각자 만든 프로그램은 하나씩 떼어 보면 문제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러 프로그램이 같은 데이터를 바꾸기 시작하면 어느 프로그램이 바꾼 값이 맞는지부터 헷갈린다.
한 곳에서 난 오류가 다른 업무에 어디까지 번지는지도 알기 어렵다.
사고가 나면 어디부터 복구할지도 누군가는 정해야 한다.
이런 일에는 회사의 업무와 데이터, 이미 운영 중인 시스템을 아는 개발자가 필요하다.
팔다리를 절단한 환자의 절반 가까이가 감염으로 목숨을 잃던 시대에서, 손 씻기와 소독이 당연해진 시대가 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지금은 그만한 변화가 몇 년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이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조금만 버티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는 하루하루를 보내기 어렵다.
이렇게 큰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을 수 있는 때는 흔치 않다.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기에는 아까운, 멋진 시기라고 생각한다.